F.Stella의 <Black Painting>은 이 후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 작품은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고도 긴장관계를 일으킨다. 이는 <black painting> 그 자체의 의미와 <blacke painting> 작품-모더니즘의 관계와 연관된다. 그것은 구성과 재료에 있어서, 즉 미술작품과 사물에 있어서, 주요하다.
2차원이라는 의미는 평면적 구성, 즉 평면적이면서도 구성적이다. 구성의 바탕이 되면서도 물질의 측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재료이자 사물이다.
회화 : 평면적 구성
조각 : 시각적 구성
이것이야 말로, 모더니즘의 공식이다.
<black painting>은 이를 교묘하게 줄타기 한다.
두꺼운 스트릭쳐 바의 두께가 줄무의 두께와 같은데, 이는 사물의 측면과 구성의 요소를 동일하게 배합한 결과이다.
프레임을 제거했다는 의미는 곧, 그림의 틀을 제거했다는 의미와 같다. 이를 위해, 그림 옆에도 검은색을 그렸다. 그 결과, 본래 구성은 본래 전면에만 색을 칠해야 하는데, 이를 넘어 구성과 재료의 경계를 넘어선다.
내부적으로도 구성과 재료가 뒤섞이게 된다. 줄무늬를 똑바로 긋기 위해서 먼저 연필로 줄을 그리고, 그 위에 붓의 크기를 맞추어 색을 칠했다. 구성만을 담겨야 하는 캔버스의 앞면에서도 조차, 재료와 구성은 뒤범벅이다.
What you see, what you see
Stella가 여기서 말하는 구성이라는 것은 Stell 개인의 창의적인 모티브이기 보다는, 비개성적인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줄무늬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효용성 있는 (건축현장, 산업현장 속에서) 모티브로서의 줄무늬이다. 즉, 개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비개성적인 모티브로서 줄을 사용한다.
개성은 본래 미술가의 내면과 상관하는데, 비개성적인 줄무늬를 사용함으로써, 미술가의 내면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버린다. 미술가의 유일무이성이라는 심리적 내면을 미술가적 해석의 범위에서 제거하려 한다. 그것의 집약체로서의 문장이 “what you see, what you see”이다. 그림의 의미는 물질적으로 구현된 외적인, 공적인 사물 자체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미술가의 심리적 내면 혹은 미적인 차원은 없다.

D. Judd <Untitled> 1965
미술가의 내면은 아주 사적인 영역이기에, 그것으로부터 탈피하여, 미술가의 공적을 외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미니멀리즘의 초석이다.
Judd는 Stella의 <Black Paninting>에서 깊은 감흥을 받아 <Untitled>를 제작한다. 미술가의 Optical Illusionism을 제거하고,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2차원과 3차원 사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3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Judd는 주장했다.
<Untitled> 역시 회화도, 조각도 아니다.
회화가 아닌 이유는
1. 벽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회화의 구성이 들어가야 하는 사각형 내부를 비워놓고, 그림을 구성짓는 틀로서의 프레임만 남겼다.
조각이 아닌 이유는
1. 아무런 시각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Caro의 <Early one Morning>과 비교하면 이를 쉽게 알 수 있겠다.

Caro <Early one Morning>1962


Morris는 자신의 작품을 조각이라 명명하긴 했는데, 여기서 조각이라는 의미는 과거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재현하 듯,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기하학적 입방체로서의 게슈탈트를 제시하였다.
Judd와 Morris 모두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미술가의 내면적 창조성이 개입할 여지를 두지 않았다.

Flavin의 작품도 살짝 살펴본다.
미니멀리즘이 제기하는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이 작품의 구성원리는 “줄줄이 늘어놓기 one after another”이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은 Judd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주문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이고 수열적인 구조는 인간의 심리와 연관되기 보다는, 산업사회의 질서와 관계 깊다. 이는 모더니즘의 Illusionism을 제거하고 찾은 모더니스트들의 산업적 질서라는 주제이다.
재료와 구성을 구분하는 모더니즘적 사고는 미술가를 신체와 육체로 나누는 사고와 연관된다. 이는 미술작품은 미술가의 정신적 과정을 대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 결과, 미술작품은 미술가의 사적 영역과 관계할 수 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언어의 문제”는 사적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즉, 사적 언어는 사적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모더니즘 미술가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에 의한 미술작품 또한 유일무이한 성질을 띄게된다. 이는 미술작품을 이해할 수 이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스트들이 개성이라는 영역을 축소하려는 이유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작품이 제시되어 있는 물리적 상태 그 자체에서 의미가 발생하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하였다.

이 작품은 요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움푹 들어간 부분이 혹은 솟아 나온 부분이 작품을 결정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왼쪽에서 독해를 자세히 하면, 솟아나오는 부분은 점점 줄어드는 수열로, 움푹 들어간 부분은 점점 늘어나는 구조이다.
1,작품의 구성원리로 작품 형태를 결정하고, 의미를 뜻하게 한다는 것이 Judd 작품 이해의 키워드 이다.
2. 이 작품은 관람자의 지각에 의해서 작품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L Beam을 세 개를 똑같은 모양으로 주문제작하여 하는 세워놓고, 엎어놓고, 눕혀놓는다. 각각이 똑같은 형태라고 관람자는 개념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지각적인 형태는 서로 달라 보이는 경험을 선사한다. 즉, 선험적인 경험은 “같다”고 말하지만, 지각적 경험은 “다르다”고 말한다.
관람자의 지각경험 없이는 작품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미니멀리즘에서 본격적으로 제시하였다. 미술가는 말을 하지 않는 존재로 물러나고, 관람자의 시간과 신체 속에서의 경험이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롤랑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연관한다.
Serra <one top Prop> 1969
1톤짜리 사각형판을 서로 기대 놓았다, 부제는 “카드로 만든 집”.
철판이 의미하는 것은 Cube 입방체이다. 하지만 아주 기하학적인 입방체가 아닌, 매번 새로이 만들어지는 입방체이다. 또한 텅 비어있는 입방체의 내면은, 결코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임시적인 구조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임시적인 구조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하여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의미의 내면성도, 고정성도 부정하는 탁월한 작품이다.


동일한 단위를 수열적으로 배열하지만, 그 수열이 무엇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미로”로 제시한다. 이는 강박적인 수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의 의미!!!
1. 외적인 구현 상태 위에서 공적인 것이 되도록 한다.
2. 관람자와 미술작품 사이의 관계를 미술작품의 의미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도입한다.![]()

그는 표면을 항상 투명하게 만든다. 입방체 속의 세상이 항상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는 관람자의 지각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반구형에 틈을 준 다음에 외부에서 조명을 비춰,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 벽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고, 틈은 거울처럼 작용하여, 관람자르 비추기도 한다.
미니멀리증믜 원천은 뒤샹과 러시아 구축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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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산업적인 생산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미술가의 위치를 거부한다.


러시아 구축주의와는 관람자를 어떻게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냐의 문제와 연관한다.
화이트 캔버스와는 달리, 뒤 벽을 요철로 만들어서, 관람자가 이동하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고안하였다.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미술작품을 독해하지 않도록 한다.



모더니즘을 조롱하는 작업을 하는 와중에,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미술가의 모습을 주기적으로 강조했다. 미니멀리즘이 모더니즘을 돌파하고 나온 후, 메인스트림이 되었을 때. 비판받는 점은 2가지 이다.
1. 개성을 거부하면서 미니멀리즘이 데려온 것은 ‘산업사회의 수열적인 질서’이다. 이것은 현대문명의 주축적인 질서이다. 이는 마치 현대문명에 투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현대미술은 현대문명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2. 너무나도 남성중심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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