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느냐 하느냐
이신애는 하느님에게 시비를 건다. 아니, 싸운다.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째려보기 까지 한다. 증오의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이글이글 타오른다. 자신의 순결과 목숨을 내놓고서 벌이는 진검승부이다.
둘 사이의 갈등을 증촉시킨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하느님 자신이었던가. 혹은 신애 스스로의 덫이었던가.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사경을 헤매던 신애를 절망의 늪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했던 이는 (김사장이 아닌, 아뿔싸) 하느님이었다.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약사의 전도로 인한) 발길을 돌렸던 교회에서 하느님은 이신애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는 멍울을 건드렸다. 누군가의 손길을 그토록 바랬던 신애의 벌겋게 타오른 심장은 울음과 통곡으로 순간 변한다.
그렇게 하느님의 딸이었던 이신애가, 아니 이신애만을 사랑으로 감싸안았던 하느님이 그녀를 배반한다. 적어도 이신애만은 그것을 "배반~배신이야~배신~"이라고 여긴다.
아들을 살해했던 웅변학원 원장, 그 역시도 하느님의 사랑을 이신애 자신 만큼이나 받고 있었다. 죄값에 대한 뉘우침과 반성으로 성한 몰골이 아닐거라고 여겼지만, 막상 그는 신애보다 더 때깔(?) 좋은 모습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만이 용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유괴살인범, 그를 하느님이 '먼저' 용서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이신혜. 그 순간부터 그녀는 하느님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자기 본위적인 인간의 탐욕을 신애로 부터 포착할 수 있다면 억지일까. 아니 진실이다. 신애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구원을 자기만의 것이라 여겼다. 이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 본연의 진실을 건드리는 포인트이다.
세상 저 끝에서 시작하는 삶
밀양은 세상 저 끝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이 동경하던 곳, 아들의 생명 마저 처참하게 짖밟아버린 곳, 그곳은 신애에게 지옥과도 다름없는 곳이다. 영화는 이미 반쪽을 잃어버린 신혜를 들이민다. 반쪽을 채워주는 이가 누구이건 간에, 그 순간 (적재적소)에 김사장은 고장난 신애의 차를 고치고, 그녀를 밀양으로 안내한다. "밀양은 어떤 곳인가요"
밀양, 비밀의 빛. 빛은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존재다. 인간이 두 발로 밟고 있는 지구를 잉태하고, 삶의 일상을 영위하는 시간을 제공하고, 무엇보다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그래서 예부터 인류는 빛을 신에 빚대고는 했었다. 비밀을 입에 머금은 신이라니. 신혜가 밀양에서 본 신은 과연 누구인가.
플라톤이 말했던가. 이데아의 세계의 완전성을. 절망의 늪에 빠진 신혜에게 우연처럼 (필자가 보기에는 필연이었다.) 다가온 신의 손은 그녀를 불행과 불운에서 평화와 안녕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완전무결할 듯한 세계도 인간 본연의 욕망의 테두리 안에서는 순간! 악으로 돌변할 수 있고, 신혜가 그러했다. 절대적 죄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준 유괴범은 (준, 그녀의 6월을 송두리째 앗아갔단 뜻인가) 이미 죄인이 아니었다. 신애의 손길이 머뭇거리던 때에 그는 용서를 받았다. 이데아의 누군가로 부터.
신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는 신애, 이는 신혜 가슴 안에 자리했던 하느님의 존재 이유 자체부터가 그녀의 욕심에서 발현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결국, 인간성은 자기 본위의 세계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 이창동은 말하고자 하였나.
이창동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신애의 절망은 그녀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는 곳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은 상황이 만들어 낸 현실이다. 소시민의 삶을 사는 그녀에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0대 전업주부이다.) 구원은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로 앗아가는 역할을 톡톡히 맡는다. 삶의 나락 어딘가로 떨어졌을 때(누구나 자기만의 블루 스토리는 스스로를 더욱 움추리게 만든다. 그녀 역시 무언가로부터 피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밀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나.
여기서 구원의 손길은 오히려 김사장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밀양에서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김사장을 투박한 시골 총각으로 대하지만, (실제로 송강호가 연기하는 카센터 김사장은 마초적이고 주변머리 없는 인물이다) 그녀를 관심있는 눈길과 애정어린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는 이는 실제로 김사장"뿐"이다. 아들 준은 그녀가 돌봐야할 연약한 존재였고, 유일한 혈육으로 등장하는 동생은 동생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찾아 볼 수 없다.
유괴를 당한 찰나, 신애는 김사장의 카센터로 부리나케 달려갔건만, 김사장은 노래 한 곡조를 뽑아 올리며 그만의 세상에 심취해 있었다. 자기적 욕망을 탐취하는 인간도, 절대절명의 순간에서(이때 오히려 인간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인간이란 존재성이란...) 오히려 구원의 손길을 청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왜 그랬을까. 아이러니하지만 짐짓 이해하는 관객이 많았으리라.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행동의 축선이 결코 맞물리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마지막 장면. 신애는 김사장이 들고 있는 (마치 장례식장의 사진을 들고 있는 듯한 포즈)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댄다. 그리고 카메라는 패닝을 하며, 정원 한 구석 빛을 살며시 드러낸다. 문학작품에서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임을 잊지말자)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과거와의 단절 혹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장치로 쓰인다. 또한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영정 속 사진처럼 거울에 반사시킨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신혜이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하기에는 삶의 진정성을 외면하는 행위이기에 (현실적인 선택은 자살이겠지만, 영화니까) 그녀는 숨을 고르고 다시금 정착의 길을 나서려 하는 듯 하다. 하지만, 우울하게도 혹은 비관적이게도 비밀의 빛은 아직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 마치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처럼. 결국 인류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타고날 수 밖에 없는 것이가.
나의 간은 무엇이라 나는 말할 수 있는가. 절대 필요하지만 매일 같이 소모하는 고통의 산물. 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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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구두님의 '밀양-함부로 사랑한다고 하지 않기' , 를 읽고 Tracked from 로망롤랑의 꿈 June 25, 2007 04:17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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