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한번 들으면 귓가에 맛있게 당기는, 되새김질을 굳이 하지 않아도 소화가 쉬운 그런 이름이었다. 상호반작용의 원칙이 그런 이름 덕분에 녀석에게는 생활의 일부로 삐걱거렸다. 타인들은 녀석의 이름을 곧잘 기억했다. 반면 녀석은 상대방의 이름 기억하기에 잼병이었다. 녀석의 특권이 오히려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녀석은 타인의 이름을 잃어버린채 지내고는 했다.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적 관계를 정촥히 짚었다. "기표는 기의 위에서 미끄러진다." 나를 지탱하는 본연의 무언가는 남에 의해 불리우는 이름 위에서 미끄러질 뿐이다. 그 둘은 어떠한 물리적, 화학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단지 이름은 브랜드 이미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할 뿐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결정체로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거짓이다. 녀석을 부리는 그 이름은 녀석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착각하고는 한다. 이름 두 장에 담긴 한자의 의미를 본연의 자신에게로 투영하려는 우를 범하고는 한다. 그러기에 녀석은 실제의 나를 잃어버린 채 자꾸 미끄러진다. 녀석은 '너'의 이름도 모른 채, '나'의 성명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살아간다.
익명성의 사회, 이름을 잃어버린 도시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르 ㄹ보낸다. 얼굴 생김새도 모르고, 실제 이름 조차 알 수 없고, 대화 과정 속 인상마저 잃어버진 사이버 세계의 일만은 아니다. 군중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은 실생활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너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부유한다. 시망바닥 마냥 사람이 북적이는 지차철 도어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도 나는 곧잘 나를 잃어버린다. 라캉은 "이름을 호명하였을 때, 사람은 대타자 즉, 사회적 이데올로기 혹은 규범 안에 갇힌다."고 말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 자체는 아이덴티티와 경결 맺으려는 손짓에 불과할 뿐이다. 라캉의 말은 익명성의 사회가 지배하는 오늘날,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이름은 기능적 수단에 불과하다. 무수한 동명이인이 존재하듯이, 이름이 액츄얼actual하고 리얼real란 녀석을 대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녀석은 누군가를 만나는 첫 자리에서 이름을 알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라는 물음표 안에 '본연의' 상대방을 담으려 할 뿐이다. 진짜 이름을 알고자 녀석은 그렇게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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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런 마음을,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는 너의 이름을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으니..
그만큼 너는 潔하다.
또..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있고.. 거기에 이름이 더해진 것이지,
이름이 먼저이고 사람이 다음은 아니다.
이름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너답게 행동하고. 살면 돼.
그게 너니깐. 그렇게 행동했던 너니깐.
사람들은 너의 이름 때문에 너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너의 경우는
너라는 사람의 매력과
매력적인 이름이 더해진 것이고.
걱정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