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쨔오반디 Zhao Bandi, <팬더반디의 말단위문 Panda Bandi Express sympathy and solicitude for the grass-roots.> 2006~2007 비디오 6mm
이 작품은 일단 형식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보인다. 그 하나가 다큐멘터리적 특성이다. 큐레이터의 작품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경험을 영상으로 기록한 영상물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가,. 디지털 아트의 핵심이라 불리우는 하이퍼텍스트적 성격이다. 6개의 TV는 마치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UCC동영상 재생프로그램과 같이,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시작과 끝을 강요하지 않는다. 1번부터 6번 까지의 TV 화면은 다른 구역을 다른 시간대에 보여준다. Window media player를 이용하여 영화를 보다가 지겨우면 재생 라인의 앞 부분을 클릭하듯이 이 작품은 비선형적 스토리 라인을 선보인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얘기 했듯이, 폭스바겐의 후원 자체는 예술의 자본 의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이다. 50여 년간 사회주의 국가로 공동 소유제를 주지했던 중국인민공화국에서, 오늘날 개방과 개혁의 여파로 인해 순수 학문 분야로서의 예술 조차도 세계 외자 대기업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작가는 표현하고자 한 듯한다.
위에서 <무림 이야기>가 현대 자본 주의 사회의 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아주 사실적인 접근 방법으로서 ‘기록’을 선택했다.
9. 주지아Zhu jia, <데이드림 DayDream> 소묘에니메이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장르의 경계 허물기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질적으로 미술관보다는 영화제에 더욱 어울린다. 소묘에니메이션이라는 소재 자체가 미술사적으로 충분한 함의를 띄지 않는 이상, 이미 영화라는 매체가 제8의 예술 영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애니메이션 부분은 이에 속하는 속성을 충분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 작품을 지금 미술관에서 보고 있다. “경계 허물기”의 장르적 속성이 여기에 자리한다.
10. 까오 샤오우Gao Xiaowu, <왜소한 남자, 뚱뚱한 남자, 여자Thin man, Fat man, lady> 조각
필자는 이 작품을 보자마자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 직장 상사와 후임, 선배와 후배, 어른과 아이 등 역할적 구분에 있어서의 인간의 일상적이지만 중요한 ‘굴욕적’ 심리를 건드렸다. 미술관에서 비로소 카타르시스다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3명의 인물이 중심이다. 모두다 입가에 (억지)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누군가에게 꾸벅 인사한다. 그 인사 역시 허례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들은 인사를 하면서도, 인사를 받는 상대방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가는 그들의 형상을 하얀색으로 표현했다. 마치 G.Segal의 <Cinema>를 보는 듯하다. 그는 모델의 일상적 포즈를 그대로 석고로 뜨고서, 이를 다시금 조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석고 자체를 가구, 건축 적 환경 안에 배치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상은 하얀 석고로만 표현되면서, 주변 환경에 비해 빈약해 보인다. 이는 곧, 인간은 주체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인간상은 속이 비어있다. 이는 현대문명 속에서 실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적인 풍만함이 결코 없는, 하얀색 껍데기에 불과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왜소한 남자, 뚱뚱한 남자, 여자> 역시 하얀색이다. 무개성적 현대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발로에서 그러한 듯 하다.
이 작품의 속을 관람자로서의 필자가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짐작하건데 이 것 역시 비어있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특히나, 필자의 웃음을 자아낸 형상은 그들의 넓적한 입가와 눈매 그리고 가지런한 손이었다. 누군가에게 아부를 필히 한다는 느낌을 사뭇 안겨주는 그네들의 행동 안에서, 팔자의 비웃음은 스스로에게 다가왔다. 내가 저렇게 행동한 적은 없는지, 저들의 비열하고도 착잡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인의 무개성적이고 매몰적인 모습 비판한다. 관람자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시키고, 이 웃음은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품을 향하지만, 몇 초 후에는 오히려 관객 스스로에게 씁쓸하게 다가오는 비수와도 같다.
하지만, 중국 문화 스스로가 처한 현실 때문일까. 제목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냉열하게 존재한다. ‘뚱뚱한, 왜소한’ 이라는 형용사가 남성 앞에는 붙여졌으나, 여성 앞에서는 그저 ‘여자’라는 팻말 뿐 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양 극단의 두 가지로 판단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직 반봉건주의적 여성관을 고수하는 중국사회의 문화적 퇴폐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우습게 여겨 오히려 이를 뛰어넘어,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자 ‘일부러’ 여성에게 폄하적인 호칭을 붙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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