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양첸Yang Qian, <다이아몬드 여인 1 Diamond Women>,
스텔라의 <블랙 페인팅 Black Painting>은 이 후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 작품은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고도 긴장관계를 일으킨다. “평면적 구성”, 즉 평면적이면서도 구성적이다. 구성의 바탕이 되면서도 물질의 측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재료이자 사물이다. 회화는 평면적 구성이라는 모더니즘의 공식이 그것이다.
<블랙 페인팅>이 회화와 조각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면, 양첸의 <다이아몬드 여인1> 역시도 아날로그로서의 회화와 디지털 그래픽의 경계선을 가까스로 걷고 있다.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는 미술관 벽에는 한 여인이 교태로운 모습으로 있다. 이를보고 있노라면, 마치 과거 유럽 시대의 초상화를 보는 느낌이 강하다. 고전주의적 특성, 즉 사실주의적 재현 혹은 이상주의적 주제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조명이 꺼진 후의 ‘뒷골목’에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관람자를 기다린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형상이다. 요염하게 누워있는 여성은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자리한다. 작가는 형광물질을 사용하여, 불빛의 유무에 따른 작품의 2면적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 개의 시공간 안에서의 반복/교체의 이미지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평면회화의 속성을 전복하는 일과도 같다.
또한 형식적 특성에 힘입어 내용적 발언 역시 '숨어있는' 진실에 대해 까발리는 느낌이 다분하다. 밤(불빛이 꺼지면)이면 인간 본연의 욕망, 욕심, 더러움, 추악함이 드러난다. 그 대상은 다이아몬든 즉, 자본을 향한 구애이다.
그러한 구애는 관람자 본인에게로 돌아오기도 한다. 형광물질을 밝히는 불빛은 소위 “나이트 불빛”이다. 이것은 하얀색 물체를 환하게 비춘다. 당시 그곳에 하양색 옷을 입었던 필자 역시도 작품 안으로 포섭되는 기분이었다. 다이아몬드, 즉 돈만을 구걸하는 우리네의 모습을 관람자에게로 투영시키는 듯 했다.
12. 시옹 윈윈Xiong Wenyun, <콩콩 Kong Kong>
자본주의의 힘은 심지어 상품으로서의 인형과 작품으로서의 그것 사이에 구분을 명확하게 두지 않는다. 이는 제도비판 계에서 이미 던졌던 말이고 한데, 미술관 혹은 미술계가 (일부러) 만드는 미술이라는 예술 형식의 범위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그것이다.
<콩콩> 앞에서 관객은 일상과 예술작품 사이의 구분을 전혀 도모할 수 없다. ‘저자의 죽음’이라 그랬던가? 이를 보고 있노라면, 저자는 상업주의에 의해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는 판단이 슬며시 파고든다. 만약 작가가 이를 상업적 이윤을 도모하기 위해 팔기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은 큰 의미를 띨 수 밖에 없다.
작가는 과연 인형 디자이너인가? 예술가인가? 상품이 미술관이라는 테두리 안에 놓여 있으면, 예술로 승화하는 것인가? 혹은 미술의 범주가 상품이라는 영역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콩콩>은 그 사이를 변주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란을 불태우기에 충분하다.
13. 싱딴원Xing Danwen, <도시연역 Urban Fiction> 사진
도시문명에 대한 자조적 비판과도 같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 커다란 공간 안에 압도되어 있는 작은 인물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화면은 대도시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이는 마치 상해시의 판박이 같은 건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인물은 (주로 여성)은 플라스틱 조립 모형 속에 숨어있다. 그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그들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도시 고층 빌딩에 사는 모습은 화이트 칼라의 부유한 이들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유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신적 압력의 증가와 공허감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여자들은 쇼핑으로 자신의 고독감을 채우려고 하고(라깡의 환영으로서의 빈공간을 채우려는 행동과 비슷하게), 어느 누구 사랑하는 사람 없는 큰 고층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외로움은 지독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텅빈 공허는 이들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살인!!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작품 안에 편입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도시문명에 대해서 직접적이면서도 묘사적으로 비판한다. 하나의 이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볼때에만 그 스토리 라인을 챙길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프레임이면서, 그것이 연작 형태로 묶일 때에만, 관객은 비로소 그 진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 R. Lichtenstein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형식적 측면에서 만화적 양식의 그림이 아닌, 조각 작품에 대한 사진의 형태로 발전되었지만,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은 같은 맥락을 포함한다. 산업의 논리에 의해 지배, 관리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산업논리의 어두음과 그늘에 더욱 관심을 둔다.
자살, 재난 등의 주제적 함의를 살펴보면, 워홀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워홀 역시도 “자살”과 같은 산업 사회 논리에 의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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